한국의문화유산/경상남도

경남 밀양 영남루

sajin365 2025. 12. 30.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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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밀양 영남루 (密陽 嶺南樓)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누정
수량/면적 : 1동(대루, 능파각, 침류각, 여수각)
지정(등록)일 : 2023.12.28
소재지 :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324 (내일동, 영남루)
시   대 :  조선시대

영남루의 시초는 통일신라 때 세운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에 있던 금벽루(金璧樓) 혹은 소루(小樓), 죽루(竹樓)라 불리는 작은 누각에서 시작된다. 이후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365년(공민왕 14)에 밀양군수 김주(金湊, 1339∼1404)가 중창하고 영남루(嶺南樓)라 한 것이 관영 누각으로서의 시작이다. 고려시대 정지상(鄭知常, ∼1135)은 영남루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야경을 표현한 한시 「영남사루(嶺南寺樓)」를 남겼다.

조선 초 밀양부사 안질(安質, ∼1447)이 영남루를 중창하면서 영남루 서쪽 주변에 소루(小樓)를 건축하였고, 1442년 권기(權技, ∼)가 소루(召樓)로 명명하였으며, 그 후 부사 이충걸(李忠傑, 1465∼1527)이 임경당(臨鏡堂, 현 침류각)으로 개명하였다. 1442년(세종 24) 연산군 때에 밀양부사 김영추(金永錘)가 임경당 반대쪽인 영남루 동북쪽에 망호당(望湖堂)을 지으면서 빈객숙소로 제공되었다. 1542년(중종 37)에는 부사 박세후(朴世煦, 1494∼1550)가 망호당을 영남루 대루의 동쪽 바로 옆으로 옮기면서 능파각(凌波閣)이라 하였고, 임경당도 침류각(枕流閣)으로 개명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6C 중반 영남루는 중앙의 대루를 중심으로 좌우 양쪽의 침류각과 능파각이 놓이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 16세기 중엽의 회화로 알려진 이경홍(李慶弘, 1540∼1595)의『밀양십이경도(密陽十二景圖)』를 보면, 대루 좌우에 전각을 각각 배치하고 있는 묘사가 지금의 영남루와 유사한 배치 형태를 보이고 있음.

하지만, 영남루는 임진왜란 때 객사와 함께 모든 부속 시설이 소실되고, 이후 중창 및 중수를 거듭하였다. 영남루는 1844년 이인재(李寅在)가 밀양부사로 재임할 당시 대루의 규모를 확장하면서 동서에 각각 능파각과 침류각을 배치하고, 대루와 침류각을 연결하는 여수각(如水閣, 층층각)을 설치하여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이때 많은 부속건물을 지었고, 영남루를 포함하여 영역 전체를 ‘밀주관(密州館)’이라 불렀으며, 관원들과 지방 빈객들을 접대하고 유숙시키는 객사로 사용하였다.

영남루의 대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 장방형 평면의 대형 목조누각으로 7량가 구조이다. 팔작지붕에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에 처마 끝에는 막새를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 구성 후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4면을 돌아가면서 난간을 설치하였다. 능파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가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대루의 우물마루와 바닥이 통한다. 침류각은 대루 서쪽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5량가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동쪽 배면 기단 위로는 계단 모양의 여수각이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경사지를 이용하여 4동의 건물을 적절히 배치한 영남루는 건물 자체의 조형미가 뛰어날 뿐 아니라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모습은 다른 누정이 따라 올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빼어난 경관으로 인하여 역사적 명사들이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 조선 선조 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은 이미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2개의 시판이 남아 있다. 주요 편액은 영남루 북쪽 처마에 걸린 세 개의 대형 편액으로,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쓴 ‘영남루(嶺南樓)’가 중앙에,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쓴 ‘강좌웅부(江左雄府)’와 ‘교남명루(嶠南名樓)’가 각각 좌우에 걸려있다.

밀양 영남루는 풍부하게 남아있는 각종 고증기록을 통해 16세기부터 현 위치를 유지하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고, 빼어난 건축형식과 배치는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으며, 수많은 명사들이 탐방하고 교류하며 남긴 시문 등은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국보(國寶)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자  료 : 국가유산포털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밀양 천진궁 (密陽 天眞宮)

분   류 :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사우
수량/면적 : 2동
지정(등록)일 : 1974.12.28
소재지 :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324 (내일동, 영남루)

영남루 경내에 있는 건물로 원래 이곳은 요선관이 있던 자리이다. 효종 3년(1652)에 지었으며 공진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조 15년(1739)에 불탄 것을 영조 25년(1749)에 다시 지었으며, 헌종 10년(1844)에 크게 수리하였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및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재위 918∼943)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하였으나 1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1층이고,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목조로 된 기와집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기단은 낮은 2기단으로 앞면에만 문이 있고, 나머지 3면은 벽으로 되어있다.

최근에 원래의 문틀에 2중의 문을 덧대어 달았는데, 기법이 미숙하여 기둥의 높이를 전통적 비례에 비해 높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개별안내판
밀양 천진궁(密陽 天眞宮)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천진궁은 단군과 역대 왕조를 세운 시조의 위패를 모셔둔 사당이다. 만덕문(萬德門)을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 얹힌 구조로, 중앙 맨 윗자리에는 단군의 영정과 위패가 있고 동쪽 벽에는 부여·고구려·가야·고려의 시조 위패가, 서쪽 벽에는 신라·백제·발해·조선의 시조 위패가 모셔져 있다.
 천진궁은 조선 현종 때인 1665년에 객사(客舍)*인 공진관(拱辰館)의 부속 건물로 세워졌으나 경종 때부터 공진관을 대신해 전패(殿牌)**를 모시고 객사로 활용하였다. 영조 때에는 불에 타기도 했는데 그 뒤 다시 지어졌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위패를 땅에 묻고 헌병대 감옥으로 사용하였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과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 등의 위패를 모시고 이곳을 대덕전(大德殿)이라 하였다. 1957년에는 건물을 크게 수리하면서 이름을 천진궁으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렀다. 
 매년 봄·가을 어천대제(御天大祭)와 개천대제(開天大祭)를 받들어 행하고 있다.

*객사: 조선 시대에 왕의 위패를 모시고 공식 행사를 하던 건물로 사신이나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 숙소.
**전패: 조선시대 지방 관청 객사에 ‘전(殿)’자를 새겨 봉안하던 목패로 왕을 상징함.

자  료 : 국가유산포털



국보 경남 밀양 영남루 
2025.07.30


문현준의사진속으로


천안 아산 세무사 문정호 세무회계 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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