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문화유산/서울경기

[서울]창덕궁

by sajin365 2014. 9. 3.
728x90

 

종   목 : 보물 제383호 

명   칭 : 창덕궁 돈화문 (昌德宮 敦化門)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1동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창덕궁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돈화(敦化)’라는 말은 원래 중용에서 인용한 것으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여기에서는 의미가 확장되어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 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보물 제 383호인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1412년 5월에 세워졌으며, 1609년(광해원년)에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돈화문에는 원래 현판이 없다가 성종 때 서거정에게 분부하여 이름을 지어서 걸게 하였다.

2층 문루에는 종과 북이 있어 정오(正午)와 인정(人定), 파루(罷漏)에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정오를 알리기 위해 북을 치는데 이것을 오고(午鼓)라고 하며, 인정은 통행금지를 알리기 위해 28번 종을 치는 것이고, 파루는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기 위해 33번의 종을 치는 것을 말한다.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남향 건물이고, 좌우 협칸을 벽체로 막아 3문형식 이다. 중앙은 어문으로 왕의 전용 문이고, 좌우문은 당상관이상 높은 관료가 드나들던 문이지만, 3사(三司: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언관은 관직은 낮아도 좌우 문을 드나들게 한 특별한 혜택이 있었다.

자료바로가기 : 문화재청

 

 

 

 

종   목 : 국보 제225호 

명   칭 : 창덕궁 인정전 (昌德宮 仁政殿)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1동

지정일 : 1985.01.08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창덕궁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다

‘인정(仁政)’은 ‘어진정치’라는 뜻이며,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法殿)이 된다. 법전은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세자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의 중요한 건물이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 순조 3년(1803)에 일어난 화재로 인한 재건, 그리고 철종 8년(1857년)에 보수공사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의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조정(朝廷)이라고 부른다. 삼도 좌우에 늘어선 품계석은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문무관으로 각각 18품계를 새겼다. 그러나 정(正)4품부터는 종(從)을 함께 포함시켰으므로 정1품에서 시작하여 정9품으로 끝나며 각각 동, 서로 12개씩 있다.

정조 때 조정의 위계질서가 문란해졌다고하여 신하의 품계에 따른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인데, 3품 이상을 당상관(堂上官)이라하고, 3품 이하를 당하관(堂下官)이라 한다.

 

품계석에 맞추어 동편에는 문관, 서편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서는데, 문관은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반, 무관은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반이라 하였으며 이를 합쳐서 조선시대의 상류 계급인 양반이 된다. 문무관은 임금님을 향해 바라보는게 아니라 문관은 무관을, 무관은 문관을 서로 마주보며 종렬로 서게되는데 임금님께 절을 하라고 “배(拜)-”하는 구령이 떨어지면 홀을 든채 국궁배례하며 서있는 채로 마주보며 절을 하고, 이것을 ‘곡배(曲拜)’라고 부른다.

 

● 인정전의 내부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참고로 5대궁 중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1887년 경복궁이다.

 

자료바로가기 : 문화재청

 

 

 

 

 


 

종   목 : 보물 제1763호 

명   칭 : 창덕궁 부용정 (昌德宮 芙蓉亭)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1동(서측면4칸, 남측면5칸, 북측면3칸)

지정일 : 2012.03.02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0 (와룡동, 창덕궁)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문화재청

관리자 : 

 

창덕궁에서 후원으로 가는 길은 현재는 내의원으로 불리는 건물군을 왼쪽으로 끼고 담으로 좌우를 막은 통로를 이용하게 된다. 이 통로는 약간 오르막길로 되어 있으며 길은 좌측으로 꺾이면서 내리막길로 변하는데 그 지점에서 부용지 일대의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3면이 경사지이며 경사가 모이는 한가운데에 방형(方形)의 연못인 부용지가 있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뜻하는데,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方池)이다. 동서 길이가 34.5m,남북 길이가 29.4m에 이르는 방형의 연못이다.

부용지의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연못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렸고, 남쪽 모서리에는 물고기 조각이 하나 있다. 잉어 한마리가 물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새겼는데, 이것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빗댄 것이다.

이 연못의 남쪽 변에 부용정이 자리 잡고 있는데, 부용정의 남쪽은 낮은 언덕에 면하고 있다. 현판이 걸려 있는 동쪽이 건물의 정면인데, 이는 이곳의 지형이 남·북·서 삼면이 낮은 언덕으로 둘려있고, 동쪽만이 훤하게 트여 있기 때문이다.

건물주변을 보면 남쪽 언덕에는 3단의 화계(花階)를 설치하고 꽃을 심고 수석을 배치하여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북쪽 연못에는 가운데에 섬 하나를 쌓고 그 뒤로 높은 언덕에 어수문(魚水門)과 주합루(宙合樓)일곽이 보이도록 하였다.

주합루의 왼쪽으로는 서향각(書香閣)이 있으며 주합루의 뒤 2단의 석대 위에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라는 편액의 작은 건물이 있다. 서향각의 뒤 높은 곳에 희우정이 있다. 연못의 서측에는 서정기비각(西井記碑閣)이 있다.

부용정은 궁궐지에 따르면 조선 숙종 33년(1707)에 이곳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는데, 정조 때에 이를 고쳐 짓고 이름을 ‘부용정(芙蓉亭)’이라 바꾸었다고 한다.『동국여지비고』에는 “주합루 남쪽 연못가에 있다. 연못 안에 채색하고 비단 돛을 단 배가 있어, 정조 임금께서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던 곳이다”라고 하여 이곳에서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으며, 신하들과 어울려 꽃을 즐기고 시를 읊기도 하였는데, 1795년 수원 화성을 다녀온 정조가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한다. 기둥에는 이곳의 풍광을 읊은 시를 적은 주련(柱聯)10개가 걸려 있다.

부용정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누각으로 연못 남쪽 위에서 봤을 때 열 십(十)자 모양을 기본으로 구성되었으며, 남동과 남서쪽에 반칸을 덧대서 소통을 원활히 하였다.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할 때 동쪽과 서쪽이 좌우대칭이다. 연못 안에 2개의 팔각 석주를 세운 다음 그 위에 가느다란 원기둥을 세우고 건물의 비례에 맞게 앙증맞은 2익공(二翼工)공포를 짜 올렸다. 정자안은 네 개의 방을 배치했는데, 배면의 방이 다른 방들보다 한 단계 높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이다.

외관을 보면 북쪽은 간결하고 남쪽은 화려한 형식을 취하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나타나며, 풍부한 형태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난간과 창호도 위치에 따라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난간은 평난간과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었는데, 특히 북쪽 연못 부분의 난간은 다른 곳보다 한단 높게 하여 변화를 주었다.

창호를 보면 외부 창은 연못으로 내민 부분에만 亞자살문을 달고, 그 밖의 다른 곳은 모두 띠살문 으로 하였으며, 들쇠에 매달면 사방으로 트이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부에는 정자살문과 팔각형 교살창을 낸 불발기창을 두어 안팎 공간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였다.

부용정은 창덕궁 후원 초입에 천원지방의 조형원리에 따라 조성한 대표적 연못인 부용지에 지은 마루식 정자로 연못에 인접하여 자연의 선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풍류를 통해 수양을 하는 한국 정자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다.

열십(十)자 모양의 독특한 평면 형태, 공간구성, 건물의 장식 등이 뛰어난 비례와 대비로 건물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으로 보존가치가 높다.

자료바로가기 : 문화재청

 

 

 

 

 

종   목 : 보물  제1769호 

명   칭 : 창덕궁 주합루 (昌德宮 宙合樓)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1동(2층 누각)

지정일 : 2012.08.16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0 (와룡동, 창덕궁)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문화재청)

관리자 :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후원에 부용지와 부용정, 영화당, 주합루가 있는데 이 중에서 북쪽에 주합루가 위치하고 있다. 주합루 주변은 3단의 화계(花階)에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화계 첫 단에는 어수문(魚水門)을 두고 주합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은 임금을 물에, 신하들은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져 있다. 어수문은 임금이, 그 옆 작은 문(협문)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창덕궁 주합루(昌德宮宙合樓)는 정조 즉위년(1776) 창덕궁 후원에 어제·어필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2층 건물이다. 기단은 네벌대의 장대석을 바른층 쌓기하고 맨 위의 갑석에는 쇠시리를 넣어 마무리하였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로 기둥은 모두 상하층 통주로 사용하였고, 사방을 외부 기둥에서 1칸씩 물려서 퇴를 두었으며, 내부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다. 공포는 궁궐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이익공으로 주두와 익공살미, 행공이 짜여지고 그 위에 재주두가 놓이며 운공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처마는 부연을 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으로 마감하였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에는 용두를,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얹어 권위가 높은 건물임을 나타내고 있다.

정조의 정책개발과 개혁정치, 조선 중기 문예부흥의 산실로서 정약용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다양한 인재들이 활동하던 중요한 공간이며, 정조가 지은 어제와 어필, 어진, 인장 등을 보관하였던 장소로 그 원형이 잘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또한 건물은 경사진 높은 지형에 배치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으며, 1층은 왕실도서 보관에 적절한 퇴와 사분합 들문을 설치하였고 내부는 온돌을 두었다. 2층 열람실은 사방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등 건물의 기능에 맞는 실 배분이 충실히 반영되었다. 이처럼 주합루는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자료바로가기 : 문화재청

 

 

 

 

종   목 : 사적 제122호 

명   칭 : 창덕궁 (昌德宮)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면적 : 550,916㎡

지정일 : 1963.01.18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문화재청

관리자 : 창덕궁관리소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창덕궁(비원포함) → 창덕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자료바로가기 : 문화재청

 

 

 

 

 

 

 

 

 

 

 

사적 제122호 창덕궁

2013.12.08 촬영
문현준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