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보령 성주사지 (保寧 聖住寺址)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수량/면적 : 67,295㎡
지정일 : 1984.08.13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번지
시 대 : 신라 문성왕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산골에 자리잡고 있는 절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석등, 5층석탑(보물), 금당건물과 그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동삼층석탑, 중앙 3층석탑(보물), 서 3층석탑(보물)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성주사지 → 보령 성주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자 료 : 국가문화유산포털
보물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 1기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번지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절의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으며, 뒤로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편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둔 것은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이며,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우아한 모습이다.
자 료 : 국가문화유산포털
보물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保寧 聖住寺址 中央 三層石塔)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 1기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번지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자 료 : 국가문화유산포털
보물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保寧 聖住寺址 西 三層石塔)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 1기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번지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성주사지에서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뒤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석탑이다. 성주사는 구체적 유래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백제 땅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그 배치구조가 특이하며 이외에도 또 다른 3기의 탑과 석비, 귀부, 석축, 초석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맨윗돌에 1층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을 두어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3층을 이루는 탑신(塔身)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치켜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지 않고,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노반)만 놓여 있다.
1971년 해체 ·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을 발견하였으나 그 안에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함께 위치한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드는 탑으로, 기단이나 지붕돌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자 료 : 국가문화유산포털
보물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保寧 聖住寺址 東 三層石塔)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 1기
지정일 : 2019.03.28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 통일신라시대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이하 동 삼층석탑)은 성주사지에 남아있는 4기의 탑 가운데 하나다. 성주사는 847년 낭혜화상(800~888, 신라 후기의 승려 무염)이 개창하여 17세기까지 사찰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조선 후기에 폐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동 삼층석탑은 조성 양식으로 보아 다른 2기의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에 같은 장인에 의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총 높이는 4.1m로 2층 기단위에 3개의 층으로 구성되었으며, 기단 상부에 괴임대 형식의 별석받침(별도의 돌로 만든 받침석)을, 1층 탑신 전‧후면에 문고리와 자물쇠가 표현된 문비(문짝 모양)가 조각된 점 등으로 볼 때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이미 보물로 지정된 2기의 탑 못지않게 균형 잡힌 비례와 체감, 우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지정가치가 있다.
개별안내판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 석탑 保寧 聖住寺址 東 三層 石塔 보물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 석탑은 금당*터 뒤에 있는 3개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탑이다. 이 탑은 승탑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에 적힌 바에 따라 정광·가섭·약사여래 사리탑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석탑은 중앙 삼층 석탑을 중심으로 양옆에 동 삼층 석탑과 서 삼층 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국내에는 이와 같은 가람 배치는 이례적인 것인데 발굴 조사 결과, 금당 앞에 오층 석탑을 세워 1탑 1금당 형식의 가람 배치를 조성한 후 뒤에 석탑 3개를 다른 곳에 옮겨 와 추가로 배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탑은 2중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으로 면석(面石)과 몸돌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있는 등 통일 신라 말기(9세기)의 전형적인 3층 석탑 양식을 띠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문 그림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이는 몸돌 안에 있는 사리공에 부처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탑은 상륜부는 없지만 균형 잡힌 비례와 체감, 우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일제 강점기부터 옆에 있는 탑은 관리 대상 문화재로 등록되었고 이어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되었던 것과 달리, 이 탑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않았다. 해방 후에도 문화재 지정에 누락되었다가 1973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19년에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 금당: 절의 본당. 본존상을 모신 법당
자 료 : 국가문화유산포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성주사지석등 (聖住寺址石燈)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석등
수량/면적 : 1기/0.5㎡
지정일 : 1974.09.01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 통일신라
◦ 통일신라 말기 성주사 창건시기에 세워진 신라양식의 석등으로 알려져 있음.
◦ 지붕돌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과 받침기둥이 가늘게 만들어 졌으며, 팔각형 지붕돌의 상륜부가 파손되었으며, 높이는 220cm이고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파괴되었던 것을 수습하여 지금에 이름.
자 료 : 국가문화유산포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보령성주사지석불입상 (保寧聖住寺址石佛立像)
분 류 :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수량/면적 : 1기
지정일 : 2000.09.20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번지
◦ 이 불상의 얼굴모양은 타원형인데 마멸이 심하여 원래의 모습을 알기 어려움.
◦ 머리는 소발이며, 정수리 부분의 육계 표현은 뚜렷하지 않음. 왼쪽 귀는
없어지고 코는 시멘트 때움 되어 전체적인 인상이 일그러졌지만 비교적 우아하고 세련되게 처리한 흔적이 보임.
◦ 목에는 삼도가 두렷하며,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들어 배에 대고 있는 형태이며 손은 결실되었음.
◦ 입고 있는 법의는 양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식이며, 어깨에서 배까지 U자형의 옷 무늬를 표현하고, 양팔 등에는 계단식 옷 무늬를 표현하고 있음.
◦ 전체적으로 이 불상은 옷 무늬, 신체 등에 표현된 볼륨, 선처리 기법 등으로 보아 9세기경에 유행한 양식으로 알려지고 있음.
자 료 : 국가문화유산포털
한국의석탑
충남 보령 성주사지의 석탑들
문현준의사진속으로
2022.10.12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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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6 - [한국의석탑/충청남도] - 충남 보령 성주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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